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냄 새
신동엽
두 연인(戀人)은 걸었다.
찬 바람이 부는 겨울 밤거리다. 외투 깃을 세워도 세워도 저녁내 걸은 두 사람의 피곤한 몸은 으스스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다방이나 홀에서 시간을 보내기엔 그들의 취미가 높았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안의 수런수런한 말소리를 들으며 두 사람은 똑같이 그들에겐 언제 저런 따뜻한 그들만의 방(房)이 마련될까 하고 생각했다.
어느 음식점 앞에서였다. 문득 그는 말했다.
“그 냄새 참 구수한데“
여인은 살짝 웃으며 외투 속의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아 끌었다. 두 사람은 다시 도란도란 그들의 인생을 의논하며 사라져 갔다.
한 겨울 밤.
거리에서 맡은 구수한 내음.
허기진 젊은이의 미각(味覺)을 잡아당긴 그 내음의 의미(意味)는 순수(純粹)하다. 먹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만 그것으로 족하다.
질리도록 코를 박고 먹어 버렸으면 삼십이 넘은 지금까지도 두 사람의 가슴에 그 내음이 그리도 그리웁게 남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두 사람의 인생은 한 고비 넘었다. 그렇게 부러워하던 다스운 불빛이 새어 나오는 그들만의 방(房)에서, 오늘은 그들의 어린것의 재롱을 웃어가며 수런수런 인생을 밤알처럼 익혀가고 있다.
책상 앞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는 문득 이런 말을 했다.
“그날 밤, 그 어느 음식점 속에서 새나오던 그런 냄새나는 찌개 좀 끓여 보우“
여인(女人)은 그날 밤처럼 그저 빙긋 웃을 뿐이다.
그녀는 생각한다.
여학교(女學校) 시절, 교정 라일락 꽃나무 밑에서 맡은 짙은 꽃 내음, 뒷동산에서 어린 시절에 맡은 들국화의 은은한 향기. 꽃 가게에서 맡은 장미꽃의, 젊음을 뇌살시킬 듯한 농향(濃香). 이런 것은 다 잊을 수 없다. 아름다운 추억과 함께 서정시(抒情詩)처럼 이따금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
그러나 냄새도 인생과 함께 자란다. 이제 그녀의 손엔 어린것의 기저귀 냄새와 살림살이를 거두는, 여인(女人)들의 손에 풍기는 시큼한 냄새가 배어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에 들국화나 라일락 냄새에서 피워 보던 꿈보다 그녀의 손으로 주물러 감각하는 이 시큼한 냄새에서 더 큰 꿈의 현실을 맛보며 즐거워할 것이다.
여인(女人)은 땀에 젖은 남자의 가슴에, 남자는 냄새 풍기는 여인(女人)의 머리칼에 각각 하루의 피곤을 묻고 행복에 젖는 것이다.
그는 생각한다. 옆을 지나가는 여인(女人)의 분(粉)냄새에서 여성(女性)을 그리워하던 젊은 시절은 얼마나 철없는 시절이었던가 하고. 그는 이제 값비싼 인공향료(人工香科)가 혐기(嫌忌)스러워진 자신을 느낀다. 변소에까지 수도를 놓고 닦아내는 서양인(西洋人)들의 인생은 얼마나 무미한가. 닦고 또 닦고, 香科와 크림으로 체취(體臭)를 위장하려는 인생은 얼마나 위선적(僞善的)인가.
어린것의 요에서 풍기는 비릿한 지린내에서 부성애(父性愛)의 극치(極致)를 체험한다.
땀에 절은 지겟군의 담배 쌈지에서 풍겨오는 체취(體臭), 흙 속에서 생생하게 올라오는 우주의 향취, 그러나 무엇보다도 밤에, 발랄한 그들의 젊음을 태우는 性의 내음은 아름다운 향기의 王子가 아니랴. 냄새는 인생과 함께 무르익는다.
바닷가에 가 보았는가. 비린내를 풍기를 바다의 내음은 억만년(億萬年) 말없이 일하는 그들의 땀내가 아닐까. 바다는 스스로 닦는 일이 없다. 바다는 스스로 화장하는 일이 없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리라.
'우리도 바다처럼 인간(人間)의 내음을 한 껏 피우며 살자'고 두 사람은 속삭인다.
내 삶의 등불은 언제나 사람과 사랑이었다.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 나를 일으켜세워준 건,
그러면서 또 나를 힘들게 외롭게 쓰러뜨린 건,
언제나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려 할 때마다
그 기대를 완전히 거둘 수 없게 한 건
언제나 사랑이었다.
내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사람이 서있는 옆에 사랑이 있는 걸 볼 뿐이다.
내 사랑이 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느낄 뿐이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 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놓고 열어 보일 수 있고 악의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가...... 사람이 자기 아내나 남편, 제 형제나 제 자식하고만 사랑을 나눈다면 어찌 행복해질 수 있을까. 영원이 없을수록 영원을 꿈꾸도록 서로 돕는 진실한 친구가 필요하리라.
그가 여성이라도 좋고 남성이라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은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 으면 된다.
때로 약간의 변덕과 신경질을 부려도 그것이 애교로 통할 수 있을 정도면 괜찮고, 나의 변덕과 괜한 흥분에도 적절하게 맞장구쳐 주고나서, 얼마의 시간이 흘러 내가 평온해지거든, 부드럽고 세련된 표현으로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나는 여러나라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끼니와 잠을 아껴 될수록 많은 것을 구경하였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많은 구경중에 기막힌 감회로 남은 것은 없다. 만약 내가 한두 곳 한두 가지만 제대로 감상했더라면, 두고두고 자산이 되었을걸.
우정이라 하면 사람들은 관포지교를 말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를 괴롭히고 싶지 않듯이 나 또한 끝없는 인내로 베풀기만할 재간이 없다. 나는 도 닦으며 살기를 바라지는 않고, 내친구도 성현같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될수록 정직하게 살고 싶고, 내 친구도 재미나 위안을 위해서 그저 제자리서 탄로나는 약간의 거짓말을 하는 재치와 위트를 가졌으면 싶을 뿐이다. 나는 때때로 맛있는 것을 내가 더 먹고싶을 테고, 내가 더 예뻐 보이기를 바라겠지만, 금방 그 마음을 지울 줄도 알 것이다. 때로 나는 얼음 풀리는 냇물이나 가을 갈대숲 기러기 울음을 친구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으나, 결국은 우정을 제일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흰눈 속 참대같은 기상을 지녔으나 들꽃처럼 나약할 수 있고, 아첨 같은 양보는 싫어하지만 이따금 밑지며 사는 아량도 갖기를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제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 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가 항상 지혜롭진 못하더라도, 자기의 곤란을 벗어나기 위해 비록 진실일지라도 타인을 팔진 않을 것이다. 오해를 받더라도 묵묵할 수 있는 어리석음과 배짱을 지니기를 바란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다 해도 우리의 향기많은 아름답게 지니니라.
우리는 시기하는 마음없이 남의 성공을 얘기하며, 경쟁하지 않고 자기하고 싶은 일을 하되, 미친듯이 몰두하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도 같아서 요란한 빛깔과 시끄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나는 반닫이를 닦다가 그를 생각할 것이며, 화초에 물을 주다가, 안개 낀 아침 창문을 열다가, 가을 하늘의 흰구름을 바라보다 까닭없이 현기증을 느끼다가 문득 그가 보고 싶어지며, 그도 그럴 때 나를 찾을 것이다.
그는 때로 울고 싶어지기도 하겠고, 내게도 울 수 있는 눈물과 추억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은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은 사랑하며.
냉면을 먹을 때는 농부처럼 먹을 줄 알며, 스테이크를 자를 때는 여왕보다 품위있게, 군밤을 아이처럼 까먹고, 차를 마실때는 백작부인보다 우아해지리라.
우리는 푼돈을 벌기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천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며, 특별히 한두 사람을 사랑한다 하여 많은 사람을 싫어 하진 않으리라. 우리가 멋진 글을 못 쓰더라도 쓰는 일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듯이, 남의 약점도 안쓰럽게 여기리라.
내가 길을 가다가 한 묶음 꽃을 사서 그에게 안겨줘도, 그는 날 주착이라고 나무라지 않으며, 건널목이 아닌 데로 찻길을 건너도 나의 교양을 비웃지 않을 게다. 나 또한 더러 그의 눈에 눈곱이 끼더라도,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었다 해도 그의 숙녀됨이나 그의 신사다움을 의심치 않으며, 오히려 인간적인 유유함을 느끼게 될 게다.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주리라.
그러다가 어느날이 홀연이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하지만 어디를 향해 가더라도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도 자기 자신이 더없이 사랑스럽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아는 사람은
다른 존재들은 해치지 않는다.
- 임현당의 <강 린포체> 중에서-
적어도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며 사랑할 수 있을 정도의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적어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는 않을 수 있을 것이다.
.. 내 자신을 소중히 하는 것이 가장 먼저다.
각자의 빛깔과 향기는 인정하면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아줄 수 있는 꾸밈 없는
순수로 서로를 보는 블랙의 낭만도 좋겠지만
우리 딱 두 스푼 정도로 하자
첫 스푼엔
한 사람의 의미를 담아서
두 번째엔
한 사람의 사랑을 담아서
우리 둘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은 슬픔이
모두 녹아져 없어질 때까지
서로에게 숨겨진 외로움을 젓는
소중한 몸짓이고 싶다
쉽게 잃고 마는 세월 속에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조금씩
잊혀져 가고 있겠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
모자람 없는 기쁨일테니
우리 곁에 놓인 장미꽃이
세상의 무엇보다도 우리를 부러워할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서로를 마주보는 찻잔이 되자
각자의 빛깔과 향기는 인정하면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 안에 담아줄 수 있는
서로에게 숨겨진 외로움을 젓는
언제까지나 서로를 마주보는 찻잔이 되자